투데이e코노믹 = 유서진 기자 | 어제 밤 10시 40분. 경기도 수원 고용노동청 앞에 기자들이 몰렸다. 삼성전자와 노조 공동투쟁본부가 2026년 임금 및 단체협약 잠정합의에 서명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총파업 예정일 불과 몇 시간을 앞두고 나온 극적 타결이었다.
삼성전자는 입장문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겸허한 자세로 성숙하고 건설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노조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최종 타결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축배를 들기엔 이르다. 합의서에 도장이 찍혔다고 갈등이 끝난 게 아니다. 석 달간의 싸움이 남긴 상흔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 곳에 더 깊이 새겨져 있다.
첫 번째 상흔: 신뢰가 깎였다
이번 분쟁에서 가장 조용히, 가장 깊게 손상된 것은 삼성전자라는 브랜드에 대한 글로벌 신뢰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가 공개 성명을 냈다. 외국 기업인 단체가 한국 기업 노사 분쟁에 직접 목소리를 낸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공급망 충격을 우려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코스피가 7800을 넘어서며 글로벌 자금이 한국 증시로 몰려드는 바로 그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SK하이닉스로 자금을 옮기려던 빅테크 고객사들의 움직임도 수면 아래서 감지됐다. 실제 이탈로 이어지지 않았다 해도, 삼성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공장'이라는 인식이 글로벌 공급망 담당자들의 머릿속에 한번 새겨지면 지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반도체 공급망에서 신뢰는 계약서보다 강하고, 한번 흔들린 신뢰는 실적 발표 한 번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두 번째 상흔: 성과급 제도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합의 내용의 세부 조건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 과정을 보면 노조가 요구한 '영업이익 15% 제도화'와 'OPI 상한 완전 폐지'가 그대로 관철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노위 조정안을 바탕으로 한 중간 어딘가에서 접점을 찾은 구조다.
그 말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과급 산정 기준의 투명성, OPI 상한의 적정 수준, DS·MX·생활가전 등 사업부 간 성과급 배분 비율. 이번 합의가 1년짜리 봉합이라면, 내년 임단협 시즌에 같은 싸움이 다시 시작된다. 조합원 찬반투표 결과에 따라서는 잠정합의가 뒤집힐 가능성도 남아 있다.
더 구조적인 문제는 '이익의 N% 요구' 공식이 산업계 전반으로 이미 퍼졌다는 것이다. 카카오 10%, 삼성바이오로직스 20%, 현대차 순이익 30%. 삼성전자가 이번에 어떤 조건으로 합의했느냐가 다른 대기업 노조의 다음 요구안 기준점이 된다. 삼성의 협상 결과가 한국 노동시장 전체의 선례로 작동한다.
세 번째 상흔: 조직 안의 균열
이번 분쟁에서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은 상처가 있다. 노조 내부 갈등이다.
전삼노(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와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 사이의 엇박자가 협상 내내 불거졌다. 5월 8일 전삼노가 사후조정신청서 관련 보도자료를 냈다가 사측과 초기업노조 양측이 사실을 부인하자 자료를 돌연 삭제한 사건이 그 단면이다. 재계에서 "노조 연대의 기본적인 정보 공유와 소통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밖에서 보기엔 공동투쟁본부지만 안에서는 이해관계가 갈렸다.
회사 안쪽도 다르지 않다. 파업 참여 직원과 참여하지 않은 직원 사이의 감정 골이 생겼다. 부서별 파업 참여율 공개 압박, 파업 미참여 직원 불이익 논란. 이런 갈등은 협상 타결 이후에도 현장에 남는다. 라인을 함께 돌리는 동료 사이의 불신은 성과급 숫자보다 조직 효율성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57조가 만든 역설
이번 분쟁의 뿌리에는 역설이 있다. 삼성전자가 역대 최대 실적을 냈기 때문에 이 싸움이 벌어졌다. 회사가 어려울 때는 분배 요구가 힘을 잃는다. 57조라는 숫자가 노조에게 명분을 줬고, 그 명분이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를 18일 파업 공포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57조는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외부 환경이 만들어준 숫자다. HBM 수요 폭증, D램 가격 90% 급등. 삼성 직원들이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시장이 그 방향으로 움직인 덕도 분명히 있다. 다음 사이클이 바뀌면 57조는 다시 10조가 될 수 있다. 호황기 기준으로 제도를 짜면 불황기에 회사가 흔들린다는 경고는 협상장 안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다뤄졌을지 모르겠다.
합의 이후의 숙제
삼성전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HBM4 수율 안정화, 파운드리 경쟁력 회복, TSMC와의 기술 격차 추격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건 협상장에서 싸운 노사 양측이 아니라, 현장에서 라인을 돌리는 12만 명의 직원들이다.
노사가 도장을 찍은 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그러나 그 싸움이 만들어놓은 불신, 시장 충격, 제도적 불씨는 합의서 한 장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사측의 다짐이 내년 임단협 시즌에 실제로 지켜지느냐가 이 상흔이 봉합되는지, 아니면 더 깊어지는지를 가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