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대만에는 'TSMC 이펙트'라는 말이 있다. 세계 최강 파운드리가 만들어낸 번영과 부작용을 동시에 가리키는 표현이다. 반도체가 대만 경제를 끌어올렸지만, 그만큼 산업 편중과 자원 쏠림 문제가 깊어졌다는 자조 섞인 진단이다. 대만 내부에서 나오는 말이 핵심을 찌른다. "TSMC가 잘될수록 대만 경제는 더 강해지지만, 더 취약해진다."
이 문장을 한국으로 옮기면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잘될수록 한국 경제는 더 강해지지만, 더 취약해진다. 대만이 먼저 걸어간 길을 한국이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대만의 부작용은 한국에게 예고편이다.
대만의 네 가지 부작용
대만이 겪은 문제는 네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인재 블랙홀이다. TSMC와 대형 팹리스가 고연봉으로 인재를 빨아들이면서 전통 제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 인력이 고갈됐다. 대학 졸업생의 전공이 전자·반도체로 쏠렸다. 둘째, 임금 격차다. 반도체 엔지니어 초봉이 일반 제조업의 2~3배 수준으로 벌어지면서 청년층의 직업 선택이 왜곡됐다. 셋째, 지역 불균형이다. 신주·타이난·타이중 과학단지로 부가 집중되면서 집값이 급등하고 지방 소도시는 공동화됐다. 신주는 '대만판 강남'이라 불릴 정도였다. 넷째, 경제 리스크 집중이다. 반도체 수출 비중이 40% 안팎까지 오르면서 글로벌 경기 하강이나 미중 갈등 같은 외부 변수에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됐다.
대만은 손 놓고 있지 않았다. '5+2 산업혁신' 정책으로 바이오·그린에너지·스마트기계·국방·IoT 등 반도체 외 축을 만들려 했다. '실리콘 아일랜드에서 멀티테크 아일랜드로'가 구호였다. TSMC 공장을 가오슝·타이난·타이중으로 분산시켜 지역 균형을 유도했고,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고 반도체 대학원을 확대했다. 그럼에도 구조적 의존은 풀리지 않았다. 성장의 엔진과 구조적 리스크가 같은 곳에 있다는 모순이 여전하다.
한국은 이미 대만보다 더 쏠려 있다
문제는 한국의 쏠림이 지금 대만 못지않거나 더 극단적이라는 데 있다. 지난달 1~20일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202.1% 급증했고,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41.7%로 1년 전보다 19.0%포인트 확대됐다. 불과 1년 만에 수출 다섯 중 둘이 반도체가 된 것이다. 대만이 수십 년에 걸쳐 도달한 40%대 비중에 한국은 단숨에 올라섰다.
KDI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9%에서 2.5%로 0.6%포인트 올렸다. 반도체 수출 증가가 그 배경이다. 그런데 KDI 정규철 거시·금융정책연구부장의 설명이 의미심장하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중동전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만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률을 끌어올린 게 사실상 반도체 하나라는 뜻이다.
이건 '반도체발 성장 착시'라는 말로 요약된다. 지표상으로는 경제가 좋아지는데, 그 온기가 반도체 바깥으로 퍼지지 않는다. 5월 고용동향에서 제조업 취업자가 14만 명 줄어 7년 3개월 만에 최대 감소를 기록한 게 그 증거다. 반도체 수출이 두 배로 뛰는 동안 자동차 부품·철강·화학 같은 다른 제조업은 인력을 줄였다. 청년 취업자도 25만 5000명 감소했다. 대만이 겪은 'K자형 양극화'가 한국에서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이 대만과 다른 점, 그리고 같은 점
한국에는 대만에 없는 자산이 있다. 산업 포트폴리오의 다양성이다. 대만이 사실상 반도체 단일 구조라면, 한국은 자동차·조선·방산·배터리·가전이라는 다른 축을 갖고 있다. 정부도 이를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다. PwC 분석에 따르면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함께 러-우 전쟁·중동 불안이 부른 방산·조선 호황이 정부 육성정책과 맞물려 시너지를 내고 있다. 국민성장펀드와 세제 혜택이 반도체·방산·조선·AI·에너지로 분산 투입되고 있다.
문제는 이 다양성이 실제 균형으로 이어지느냐다. 조선은 수주 호황이지만 인력난에 시달리고, 자동차는 소프트웨어 전환 비용에 눌려 있으며, 방산은 성장 중이지만 GDP 비중이 아직 작다. 다른 축이 있긴 한데, 반도체만큼 빠르게 이익을 내지 못한다. 결국 숫자로 보면 한국도 대만처럼 반도체 한 곳에 매출도 성장도 쏠리는 구조다. 포트폴리오가 넓다는 게 곧 균형 잡혔다는 뜻은 아니다.
임금과 지역 문제도 닮은꼴이다. 반도체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임금 격차, 수도권·기흥·평택·청주 중심의 부 집중, 그 외 지역의 상대적 정체. 대만의 신주가 강남이 됐듯, 한국도 반도체 클러스터 주변으로 자산이 몰린다. 삼성전자 노조가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으로 요구하며 파업 직전까지 간 것도, 호황의 과실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이미 시작됐다는 신호다.
핵심 질문: 호황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대만도 한국도 아직 풀지 못한 숙제는 하나로 모인다. 반도체 초호황의 과실을 어떻게 다른 산업으로 번역할 것인가.
방향은 몇 가지로 좁혀진다. 첫째, 반도체 이익이 세수와 투자로 전환돼 다른 산업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선순환 구조다. 반도체에서 번 돈이 방산·조선·바이오의 R&D와 인프라로 흘러야 한다. 둘째, 반도체 전후방 생태계의 확장이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해야 대기업 단독 호황이 산업 생태계 전체의 성장으로 번역된다. 셋째, 인재 공급의 확대다. 대만이 그랬듯 반도체가 인재를 빨아들이는 게 불가피하다면, 전체 이공계 인재 풀 자체를 키워 다른 산업의 인력난을 막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리스크 인식이다. 반도체 수출 비중 41.7%는 슈퍼사이클이 꺾이는 순간 그대로 하방 리스크가 된다. 한국수출입은행은 2026년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11% 증가하되 미국의 관세 정책 등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메모리 가격이 영원히 오르지는 않는다. D램 가격이 90% 뛴 것처럼, 빠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2023년 1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6000억 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강해지는 동시에 취약해지지 않으려면
대만의 교훈은 명확하다. 반도체 의존은 성장과 리스크를 같은 크기로 키운다. 호황기에 그 과실을 다른 산업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두지 않으면, 사이클이 꺾일 때 국가 경제 전체가 함께 흔들린다.
한국은 지금 그 번역의 골든타임에 있다. 반도체가 역대급 이익을 내는 지금이, 그 돈으로 다른 산업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기다. 코스피 8000과 청년 일자리 25만 개 감소가 같은 시기에 공존하는 이 모순을 풀지 못하면, 한국은 대만이 빠진 함정을 더 깊은 형태로 반복하게 된다.
"삼성과 SK가 잘될수록 한국 경제는 더 강해지지만, 더 취약해진다." 이 문장이 자조가 아니라 극복 대상이 되려면, 호황의 끝이 아니라 한복판인 지금 움직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