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해방의 날' 1주년,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
오늘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른바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을 선언하며 전 세계 183개국에 국가별 차등 상호관세를 전격 부과하겠다고 밝힌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해 4월 3일 국가별 상호관세를 확정해 발표했고, 유예 기간을 거쳐 2025년 8월 7일 오후 공식 발효됐다.
그 1년 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2026년 2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IEEPA(국제비상경제권한법)가 대통령에게 관세 부과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며 상호관세를 위법으로 판결했다. 트럼프 2기의 핵심 통상 무기가 법적 근거를 상실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국 수출 기업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엔 아직 이르다. 관세 전쟁은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관세는 무효됐지만, 관세는 그대로다
대법원 판결 직후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대법원은 헌법 제1조에 따라 관세 부과 권한이 의회에 속한다고 판단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근거로 삼은 IEEPA에 대통령의 관세 부과 권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대체 카드를 꺼냈다. 연방대법원 판결 직후 백악관은 무역법 제122조에 따라 150일간 10%의 관세를 한시적으로 부과했으며(2월 24일 발효, 7월 24일 종료 예정), USTR은 무역법 301조 조사를 신속히 개시했다.
한국 입장에서 실질적 피해는 제한적이다. 232조에 근거해 관세가 부과되고 있던 자동차·자동차 부품(관세 15%), 반도체·컴퓨터(면제) 등 주요 품목은 기존 관세를 그대로 적용받는다. 미국 관세는 최혜국대우(MFN) 관세에 글로벌 관세(15%)가 합산되는 구조인데, 미국과 FTA를 맺은 한국은 최혜국대우 관세가 0%에 가깝기 때문에 전반적인 수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분석이 나온다.
새로운 전선: 무역법 301조 조사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상호관세가 아닌 무역법 301조다. 2026년 3월 11일 USTR은 한국을 포함한 16개국을 상대로 제조업 분야의 '구조적 과잉생산능력 및 과잉생산'과 관련한 301조 조사를 개시했다. 4월 15일까지 서면의견 제출을 마감하고, 5월 5일부터 공청회를 열 예정이다.
이번 조사는 상대국의 행위·정책·관행이 미국 상거래를 제한하거나 부담을 가중하는지 판단하기 위한 절차로, 단순한 경고를 넘어 실제 관세·비관세 조치로 이어질 수 있는 정식 통상 절차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업계의 경계심이 높다. IEEPA 기반 관세가 즉각 부과 가능했던 것과 달리, 301조는 수개월의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그 결과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경제의 취약성: 숫자로 보는 대미 의존도
이번 관세 전쟁이 한국에 유독 가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다. 한국은 수출의 대미 의존도가 19%에 달하고, GDP 대비 대미 수출 의존도는 9.4%로 중국(2.5%)이나 인도(2%)보다 훨씬 높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관세로 인한 GDP 직접 충격 순위에서 한국은 6위로, 실효관세율이 훨씬 높은 중국(8위)이나 일본(11위)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트남 변수다. 베트남 대미 수출에서 삼성전자 등 한국 업체들의 생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가까워, 베트남에 부과된 관세가 고스란히 한국 기업들의 타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CNN은 한국의 GDP가 1분기 0.1% 감소하며 4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고 보도했고, 뉴욕타임스는 한국 경제는 상품서비스 수출에 극도로 의존해 2023년 경제 생산량의 44%가 수출이라며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했다.
협상의 성과와 남은 과제
한국 정부의 대응이 마냥 수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30일 한미 관세 협상을 타결해 상호 관세 15%를 적용받게 됐으며, 실제 합의 문서는 10월 29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11월 14일 공개됐다.
그러나 협상 이후에도 통상 압박은 이어졌다. 2026년 1월 27일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국회가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하겠다고 위협했다. 2026년 1월에는 미국 상무부가 한국산 화학제품(모노머, 올리고머)에 대해 덤핑이라는 취지의 예비 판정을 내놓기도 했다.
반도체는 당분간 안전지대로 평가된다. 한국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미국 내 별다른 대체재가 없어, 반도체 품목 관세 부과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출 포트폴리오 재편,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
전문가들은 이번 관세 전쟁이 단순한 통상 마찰이 아니라 한국 수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요구하는 신호라고 입을 모은다. KPMG는 2026년 한국 경제의 주요 이슈로 트럼프 리스크, 저성장 고착화와 양극화, 확장적 재정·통화정책, 금융시장 변동성을 꼽으며, 수출 회복도 반도체·화장품 등 특정 업종에 편중될 것으로 전망했다.
전체 수출에서 상위 5대 품목이 50% 수준을 차지하며 반도체만 23%를 점유하는 한국의 품목 집중도는 세계 10대 수출국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글로벌 수요 변동이나 기술 사이클 변화에 취약한 구조라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트럼프 관세는 이 구조적 문제를 통상 리스크라는 형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수출 대기업들은 대응 방안으로 수출시장 다변화(26.9%), 글로벌 생산·조달·물류 구조 재조정(19.8%), 환율 리스크 관리 강화(16.5%) 순으로 꼽고 있다. 정부에 바라는 것도 분명하다. 관세율 최소화를 위한 협상력 확보, 그리고 수출시장 다변화 지원이다.
'해방의 날' 1년이 지났지만, 한국 경제가 미국 통상 정책의 변덕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불확실성에 맞서는 단기 협상 전술이 아니라, 10년을 내다본 수출 포트폴리오의 근본적 재설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