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미국과 브라질을 잇달아 찾았다. 한쪽에서는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떠오른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의 경쟁력을 점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20억 인구를 품은 신흥시장 공략의 속도를 높였다. 구 회장의 발길은 LG그룹이 지금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나침반이었다.
"하드웨어를 넘어라"…ESS 통합 솔루션 역량 강조
구 회장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LG에너지솔루션의 ESS 시스템통합(SI) 자회사 버테크(Vertec)를 찾았다. 버테크는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 하드웨어 공급을 넘어 소프트웨어 기반의 운영·관리 역량을 결합한 통합 ESS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인수한 회사다.
현장에서 구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어떤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업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미국의 관세 정책 불확실성과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센 파고 속에서도 본질적인 경쟁력을 잃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이어 "ESS 배터리 하드웨어 공급을 넘어 부가가치가 높은 통합 솔루션 역량을 높여 시장을 선도하는 압도적 지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터리를 만들어 파는 회사에서, 에너지를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회사로의 전환을 직접 주문한 것이다.
구 회장의 이 같은 강조는 AI 시대의 에너지 수요 구조 변화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다. 챗GPT로 촉발된 생성형 AI의 확산, 그리고 로봇·자율주행 등 피지컬 AI의 부상은 전력 소비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다. 데이터센터 한 곳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전력량은 중소도시 수준에 이르렀고, 전력망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용량 ESS 수요는 급격히 늘고 있다. ESS는 더 이상 재생에너지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AI 인프라의 핵심 구성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장 성장세도 이를 뒷받침한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시장 규모는 지난해 약 300GWh(기가와트시)에서 2030년 750GWh 수준으로 2.5배 이상 확대될 전망이다. AI 데이터센터 증설, 산업 전동화,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세 가지 수요 엔진이 동시에 가동되고 있는 덕분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 흐름을 선점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ESS 시장에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도입하고, 북미 생산 거점 5곳을 ESS 생산라인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북미에서 LFP ESS 배터리를 직접 생산해 공급하는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이 유일하다. 미국산 배터리에 대한 인센티브 혜택과 공급망 안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전략이다.
브라질로 직행…'글로벌 사우스' 공략의 현장
미국 방문을 마친 구 회장은 곧바로 브라질로 향했다. 브라질 아마존 강변의 도시 마나우스에 위치한 LG전자 생산법인과 현지 유통 매장을 직접 둘러보며 중남미 사업 전략을 점검했다.
브라질은 인구 약 2억1,000만 명, 중남미 GDP의 약 40%를 차지하는 이 지역 최대 경제권이다. LG전자는 이 시장을 단순한 판매처가 아닌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에는 냉장고 신공장을 구축 중이며, 올해 7월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브라질 특유의 높은 수입 관세와 복잡한 규제 환경에 대응하면서 현지 수요를 안정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포석이다.
구 회장의 브라질 방문은 그가 그리는 '글로벌 사우스' 전략의 연장선이다. 그는 지난해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직접 찾은 데 이어 올해 브라질까지 발걸음을 이었다. 인도·동남아·중남미를 아우르는 약 20억 인구의 신흥 시장은, 성숙기에 접어든 선진국 시장과 달리 중산층 확대와 가전 보급률 상승이 맞물리며 성장 여력이 크다. 구 회장이 해마다 직접 현장을 찾는 데는 이 시장을 LG의 미래 성장 엔진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속도와 실행'…구광모 경영 키워드의 현장 버전
이번 해외 현장 행보는 구 회장이 올해 들어 일관되게 강조해온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그는 지난달 25일 올해 첫 사장단 회의에서 "AX(AI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이며, 완벽한 계획보다 빠른 실행이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숙고보다 실행, 회의실보다 현장을 택하는 그의 스타일은 이번 미국·브라질 방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배터리 사업에 대한 의지도 흔들림이 없다. 구 회장은 지난해 주주총회에서 "배터리는 미래 국가 핵심 산업이자 그룹 주력 사업으로 반드시 성장시킬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글로벌 배터리 업황이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는 가운데서도, 그는 ESS라는 새로운 성장 축을 중심으로 반등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AI 인프라의 심장인 ESS, 그리고 다음 세대 소비자를 품은 글로벌 사우스. 구광모 회장이 직접 챙긴 두 개의 현장은 LG그룹이 다음 10년을 어디서 찾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