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동두천 4.2℃
  • 구름많음강릉 9.1℃
  • 맑음서울 4.9℃
  • 구름많음대전 6.8℃
  • 맑음대구 8.9℃
  • 흐림울산 9.9℃
  • 맑음광주 8.0℃
  • 구름조금부산 10.2℃
  • 맑음고창 7.5℃
  • 황사제주 11.8℃
  • 구름많음강화 4.9℃
  • 구름조금보은 5.7℃
  • 흐림금산 6.2℃
  • 흐림강진군 9.1℃
  • 구름많음경주시 9.6℃
  • 맑음거제 9.5℃
기상청 제공

IT일반/과학

[박재형 칼럼] 농협의 ‘쇄신 쇼’로는 무너진 신뢰 못 되찾는다

URL복사

투데이e코노믹 = 박재형 기자 | 2025년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농협의 민낯은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였다. 중앙회장의 금품수수 의혹, 상호금융의 부동산 PF 부실, 계열 금융사의 반복되는 금융사고와 내부통제 실패, 온라인 유통 자회사의 누적 적자까지. 어느 하나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농협의 간판 뒤에서 오랫동안 누적돼 온 구조적 병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모습에 가깝다.

 

위기의 출발점은 리더십 붕괴다.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은 회장 선거를 앞두고 계열사와 거래하던 용역업체 대표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억대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다. 국감장에서는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는 말로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혐의의 실체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라는 말 뒤에 숨었다. 전국 1,100여 개 조합을 이끄는 수장의 도덕성이 흔들리는 순간, 조직 전체의 통치력도 함께 무너진다. 선거 캠프 출신 인사들로 상무급과 이사회가 채워졌다는 ‘보은 인사’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중앙회 리더십은 이미 도덕적 설득력을 상실했다.

 

문제는 도덕성에 그치지 않는다. 리더십의 공백은 곧바로 재무건전성과 사업 구조의 취약성으로 이어졌다. 상호금융 부문의 총 연체 규모가 반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불어난 가운데, 그 중심에는 부동산 PF 대출이 있다. 저금리기에 공격적으로 취급했던 딜들이 부동산 경기 급랭에 직격탄을 맞으면서, 연체율이 20%를 넘는 구간까지 등장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부실이 단순한 ‘시장 상황 탓’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신탁사를 통한 대출에 농협대 출신 간부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는 사실은, 심사 과정에서 이해상충과 관치성 의사결정이 작동했을 가능성을 의심케 한다.

 

이 부실의 부담은 결국 농민 조합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역 농협의 대출 연체율은 농협은행의 10배 수준까지 치솟았지만, 일부 농·축협은 천억 원에 육박하는 적자를 내고도 수백억 원대 성과급을 나눠 가졌다.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은 불투명하고, 보상 구조는 왜곡된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다. ‘농업인을 위한 협동조합’이라는 존재 이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장면이다.

 

금융 계열사의 내부통제 실태 역시 심각하다. 농협은행에서는 직원이 감정평가를 수십 차례 반복해 대출 한도를 무리하게 키운 사례, 코인·주식 투자 손실을 메우기 위해 고객 자금을 빼돌려 부당대출을 받은 사례 등이 연이어 드러났다. 최근 몇 년간 횡령 사고가 수백 건에 이르고, 그 중 상당수가 내부 감사가 아니라 외부 제보와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는 사실은 상시 모니터링 체계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룹의 또 다른 축인 NH투자증권과 NH농협생명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개매수 관련 미공개 정보를 활용해 임원급이 부당이득을 챙겼다는 의혹, 계열사와의 수의계약 구조 속에서 리베이트와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된 보험사 건까지, 문제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내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와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지 개인 일탈이 아니라, 그룹 전체의 윤리 수준과 거버넌스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유통 부문은 또 어떠한가. 농산물 유통 혁신을 기치로 내세운 온라인몰 ‘농협 라이블리’와 ‘농협몰’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민간 커머스와의 경쟁에서 완패하고 있다. 한우 가격이 민간 플랫폼보다 비싸고, 공시 소매가보다도 고가에 형성된 구조에서 소비자가 농협 플랫폼을 선택할 이유는 없다. 그 결과는 수백억 원대 누적 적자라는 숫자로 돌아왔다. 농민에게 더 나은 판로를 제공한다는 애초의 명분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중앙회가 연일 ‘고강도 쇄신안’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인사혁신, 내부통제 강화, 수의계약 원칙적 금지, 사건·사고 조합 지원 제한, 책무구조도 도입 등 문구만 보면 어느 금융지주 못지않은 개혁 메뉴판이다. 그러나 그 쇄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이 금품수수, 불법대출 개입 의혹 등 각종 사법 리스크의 당사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이 개혁은 ‘셀프 면죄부’ 혹은 ‘꼬리 자르기’로 읽히기 쉽다. 신뢰 위기를 촉발한 인물들이 동시에 혁신의 얼굴을 자처하는 구조에서 진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금융권 안팎의 냉정한 시각이다.

 

농협의 문제는 어느 한 개인, 한 계열사의 일탈로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중앙회-금융지주-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 상호금융과 은행·카드·증권·보험이 뒤엉킨 사업 구조, 선거와 인사가 과도하게 결합된 조직 문화, 내부통제가 형식으로 전락한 관행까지, 구조 자체가 잘못 설계돼 있다는 의심을 받는 단계다. ‘농업인이 행복한 국민의 농협’이라는 슬로건이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면, 이제는 몇몇 규정 손질이나 인사 몇 명 교체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첫째, 중앙회와 금융지주 간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 100% 지분 구조가 자회사 전문경영을 뒷받침하기보다 정치화된 인사와 관치 경영의 통로로 작동해 왔다면, 거버넌스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둘째, 상호금융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건전성 기준 재정비가 불가피하다. 경쟁력이 없는 조합의 통폐합, 부실 PF에 대한 투명한 손실 인식과 책임 소재 규명이 선행돼야 한다. 셋째, 내부통제는 제도 도입이 아니라 집행의 문제다. 책무구조도, TF, 가이드라인보다 중요한 것은 ‘사고를 내면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조직 내 신호를 실제 사례로 축적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쇄신을 주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지금 농협이 맞이한 위기는 리더십의 부재에서 비롯된 만큼, 그 해법 역시 리더십의 교체와 책임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수장이 자리를 지킨 채 내놓는 개혁안은 어떤 수사로 포장해도 신뢰를 얻기 어렵다. 농협이 진정으로 농업인과 국민 앞에 다시 서려면, 아픈 진실을 직시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부터 먼저 책임지는 것. 그 뻔하지만 가장 어려운 순서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배너

기획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