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e코노믹 = 이혜진 기자 |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회복 국면에 진입하고 있지만, 이번 사이클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비대칭 회복'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공지능(AI)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IT 수요는 여전히 완만한 회복에 그치면서 업종 내 양극화가 어느 때보다 뚜렷해지고 있다.
■ AI가 주도하는 '슈퍼사이클'… 시장 규모 1조 달러 목전
현재 반도체 시장의 핵심 성장 동력은 단연 AI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는 2026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전년 대비 25% 이상 성장해 약 9,750억 달러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으며, 이 중 메모리 부문은 30%대의 증가세로 시장 전체 성장률을 웃돌 것으로 내다봤다. 반도체 시장의 연간 매출 1조 달러 돌파가 당초 예상보다 4년 앞당겨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데이터센터용 GPU, 고대역폭 메모리(HBM), 고성능 서버용 CPU 등 AI 관련 제품군은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강한 수요를 보이고 있다. 특히 AI 모델 학습과 추론에 필수적인 고성능 반도체는 가격 상승과 함께 높은 수익성을 기록 중이다.
■ 국내 기업 실적 양극화… SK하이닉스 '질주', 삼성은 '추격'
이러한 흐름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국내 메모리 빅2의 희비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의 선도적 지위를 바탕으로 2025년 3분기 매출 24조 4,489억 원, 영업이익 11조 3,834억 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분기 실적을 달성했다. 영업이익률이 46.6%에 달했고, 연간 기준으로도 삼성전자를 처음으로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HBM 수요 대비 공급이 2027년에도 타이트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자체 전망을 내놓으며 5년간 연평균 30% 이상 성장을 예측했다.
삼성전자도 반격에 나서고 있다. 엔비디아의 HBM3E 인증을 2025년 3분기 공식화하면서 HBM 점유율이 단일 분기 기준으로 17%에서 35%로 급등했다. 삼성전자 DS 부문의 2025년 3분기 영업이익은 7조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배 수준으로 늘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2026년 합산 영업이익이 200조 원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해외 기업 사례… TSMC·엔비디아·마이크론의 엇갈린 운명
글로벌 무대에서도 AI 포트폴리오 보유 여부에 따른 실적 격차는 뚜렷하다. TSMC는 엔비디아, 애플, AMD 등의 첨단 칩을 독점 생산하며 2025년 4분기 매출 337억 달러를 기록, 전년 동기 대비 35.9% 급증했다. 영업이익 증가율은 51%를 넘었고, 총이익률은 62.3%로 역대 최고 수준을 달성했다. 시장조사 기관 델오로 그룹에 따르면 4대 하이퍼스케일러가 올해 약 6,000억 달러의 데이터센터 자본지출을 집행할 예정이며, 이 중 약 75%가 AI 인프라에 직접 투입된다.
마이크론은 AI 메모리 수요에 힘입어 2026 회계연도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57% 급증하는 '더블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그러나 차세대 HBM4 경쟁에서는 한국 기업에 밀리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에 탑재될 HBM4는 SK하이닉스가 약 70%, 삼성전자가 약 30%를 공급하는 구도로 굳어지며 마이크론은 공급망 진입에 사실상 실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PC·스마트폰은 여전히 '더딘 회복'… 범용 메모리는 반전 조짐
반면 PC와 스마트폰 등 전통적인 IT 수요는 회복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디다. 팬데믹 기간의 수요 선반영 효과와 함께 소비자 교체 주기가 길어진 탓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도 반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HBM 생산 비중 확대로 일반 메모리 공급이 구조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스마트폰·노트북·자동차에 들어가는 범용 메모리 품귀 현상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KB증권은 "범용 D램 가격 상승으로 DDR5 마진이 HBM3E를 추월하며 수익성이 역전될 것"이라고 분석했으며, 일부 범용 메모리의 영업이익률이 70%에 달한다고 밝혔다.
■ 투자 사이클의 재편… 'AI 인프라 중심'으로 집중
투자 사이클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5년 DS 부문 설비투자 40조 9,000억 원에서 2026년 투자 규모를 더욱 확대할 방침이다. HBM 월 생산량을 17만 장에서 20만 장으로 끌어올리고, 미국 텍사스 테일러 파운드리 팹을 기존 4나노 계획에서 2나노로 전면 전환해 2026년 본격 가동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 역시 2025년 29조 원에 이어 2026년 30조 원대 중반까지 설비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AI 인프라 투자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아마존은 2026년 한 해에만 자본지출로 2,00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으며, 구글·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도 연간 AI 관련 자본지출을 30~50% 씩 증액하고 있다.
■ 리스크도 상존… 공급 과잉·지정학·중국 변수
다만 리스크 요인도 존재한다. 골드만삭스는 "HBM 공급 과잉으로 2026년 가격이 10%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변수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중국향 매출 비중이 20~30% 수준으로, 규제 범위 확대 여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2025년 초 딥시크 쇼크에서 목격했듯, 단 하나의 외부 변수가 섹터 전체를 단기간에 뒤흔들 수 있다는 교훈도 남아 있다. 업계에서는 AI 인프라 투자가 2028년 이후 증가세가 둔화될 경우 HBM 수요도 정상화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 '동시 회복'이 아닌 '선별적 성장'의 시대
결국 이번 반도체 사이클의 핵심은 '동시 회복'이 아닌 '선별적 성장'이다. AI라는 새로운 수요가 산업 전체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그 혜택은 특정 기술과 특정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현대차증권은 "AI 수요가 역사적 반도체 사이클 패턴을 깨고 6년 연속 성장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업계에서는 "과거 반도체 사이클이 전방 산업 전반의 동반 회복에 기반했다면, 현재는 AI라는 특정 수요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며 "향후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게 AI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